최소 며칠에 한번 얼마 만큼은 하자-라는 조건들로 자신을 관리하기
해야 할 일들을 “급한 일 vs 급하지 않은 일"과 “중요한 일 vs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나누는 아이젠하워의 시간 행렬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아마도 가장 까다로운 종류의 일이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자기 관리 측면에서는 운동을 한다던가,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습득한다던가,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취미생활을 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모두 이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나 한다. 단기간동안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장기간 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언젠가는 문제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대체로 커리어가 발전함에 따라서 점점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결정에 의존하게 되고, 예상치 못하게 급한 요청을 받는 경우들도 빈번해진다. 그러다 보면 내 시간을 자기 주도적으로 계획하기가 어렵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처음 시니어가 되면서 주위에서 쏟아지는 요청들을 야근까지 하면서 정신없이 처리하다가, 결국 한참동안 굵직한 일들은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결국은 번아웃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이런 번아웃을 막기 위해서는 필요한 거절을 잘 해야 한다는 조언은 자주 들었고 크게 공감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측면에서는 어려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내가 방금 받은 이 승진 문서 심사 요청을 수락한다면 요청한 사람에게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일은 다른 어떤 일과 트레이드 오프 관계에 있는 것인가? 를 고민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한 트레이드 오프가 보이지 않는다. 일 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가족과의 관계 등 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면 더욱 어렵고. 기회 비용이 분명하지 않으니 결국 웬만하면 수락하게 된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계속해오다, 최근에는 “최소 조건"들 중심으로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정말 이것을 최소한 며칠에 한번 얼마 만큼은 꼭 해야 한다"는 기준들을 몇개라도 세우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 경우에는 하루에 논문 1편을 읽기, 하루에 코딩처럼 기술적인 일을 하는 시간을 1시간 이상 갖기, 일주일에 3번 30분 이상 운동하기, 금요일 밤에는 영화를 보기, 뭐 이런 것들을 최소 조건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앞의 두개처럼 업무의 일부인 것들은 회사 캘린더에 가능한 일찍 미팅을 잡을 수 없는 “바쁜 시간"으로 설정해 둔다.
조금 부끄럽지만 보다시피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기준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경우 이 만큼도 흔들림 없이 꾸준히 계속하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다고 느낀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각 조건들을 얼마나 만족시켰는지 적고, 매 주가 끝날 때마다 그 주에 적어놓은 것들을 보면서 어떤 목표가 너무 낮거나 (그런 경우는 없다) 너무 높은지 확인해 본다.
최소 조건 중심으로 자신을 관리할 때의 장점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며칠째 지속적으로 “하루에 논문 1편을 읽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면, 일단 이 목표가 내게 정말 필요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 커리어라든지 자기만족을 위해 이 조건은 정말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게 어떤 환경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애석하지만 많은 경우 “더 이상 이 조건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라고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최소 조건들을 관리하다 보면 명시적으로 우선순위를 고민하게 되고, 이런 고민 후에 포기하는 것이, 별 생각 없이 하다 말다 하다가 유야무야 그만두게 되는 것 보다는 자기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부터는 몇 달마다 자기관리에 쓸 수 있는 여력에 큰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최소조건들 관리를 통해 현재의 상태를 재확인하고 하나씩 인생의 목표들을 줄여나가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눈물이 흐르네요…
최소 조건들이 유용한 또다른 이유는 많은 종류의 기술 계발에 있어서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나 악기 연주의 경우 아주 많은 시간을 쓰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계속하면 장기적으로는 누적되는 측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의욕의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의욕이란 화초와 같아서, 꾸준히 유지가 될 때는 마치 영원히 내 삶과 함께할 것 같지만 두세달만 방치해도 의외로 더이상 찾아오지 않는 경험을 많이들 하게 된다.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에 하루라도 기타를 한 시간은 치자- 라는 다짐을 지속하다 보면, 특별히 실력을 늘리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시간이더라도, 이번에 치는 곡을 마무리하고 나면 다음엔 뭘 할 지 생각해 본다거나 유튜브 보며 빈둥거리는 시간에도 연습법들을 찾아보게 된다거나 하며 태도가 아예 치지 않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많은 방법론들이 그렇듯 단점들도 있다. 가장 치명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관리해서는 어떤 일에 충분히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내 경우 아주 테크니컬한 새로운 연구 분야에 진입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 중인데, 이런 식으로 최소한의 시간만 써서는 좀처럼 발전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다. 20대까지는 다른 것들을 돌보지 않고 하나에 몰입해서 많은 시간을 쓰고 나면 크게 성장해 있는 자신을 느꼈는데, 더이상 그런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해 많이 아쉽다. 그러나 이제 내가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내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내가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그런 방식의 성장은 이제 포기하거나, 아니면 커리어를 완전히 틀어야 할 것 같다.
글을 이렇게 쓰긴 했지만 이런 조건들을 아주 엄밀하게 지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시간을 어떻게 쓸 지 고민할 때 가이드라인이 되는 생각의 프레임워크 정도로 쓴다. 특히 일을 하다 보면 발등에 정말 불이 떨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때는 과감하게 당분간 포기한다. 그러면 무슨 최소 조건이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형태의 자기관리를 계속 하다 보니 한 번 흐트러져도 다시 리듬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좀 곁가지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의 개성과 능력은 상당 부분 “최소한 XX는 해야지!”의 XX가 무엇인지에 따라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프리젠테이션을 하는데 최소한 말 더듬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탑티어 학회에 논문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험 설계는 깔끔하게 되어 있는 논문을 쓰겠다" 같은 최소한-들이 남들이 포기하고 그만두는 시점에 조금 더 힘을 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정의하는 최소한-들은 무엇인가?”를 평소에 고민하는 편이다 보니, 자기 관리도 이런 측면에서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글도 최근에 뭔가 글을 써 본지 너무 오래 됐다는 생각에, 최소한 몇 달에 한 번은 뭔가를 써야지! 하면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곧 포기하게 될 목표가 아닐지…